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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몬도 몬테쿠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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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라이몬도 몬테쿠콜리는 1609년 이탈리아에서 태어난 군인이자 군사 이론가이다. 30년 전쟁에 참전하여 여러 전투에서 활약했으며, 1661년부터 1664년까지 신성 로마 제국 군 사령관으로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명성을 얻었다. 네덜란드 계승 전쟁과 네덜란드 침략 전쟁에도 참전했으며, 1673년에는 윌리엄 3세와 연합하여 프랑스 군을 격퇴했다. 그는 17세기 최고의 군인 중 한 명으로 평가받으며, "전쟁에는 세 가지가 필요하다. 1. 돈. 2. 돈. 3. 돈."이라는 말을 남겼다. 1680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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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몬도 몬테쿠콜리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엘리아스 그리슬러의 라이몬도 몬테쿠콜리 초상화
엘리아스 그리슬러의 라이몬도 몬테쿠콜리 초상화 (1650년경)
출생일1609년 2월 21일
출생지모데나 레조 공국 파불로넬프리냐노
사망일1680년 10월 16일
사망지오스트리아 대공국 린츠
매장지
군사 경력
소속 국가신성 로마 제국
군 종류제국군
복무 기간1625년–1675년
최종 계급원수
주요 참전30년 전쟁
브라이텐펠트 전투
뤼첸 전투
뇌르틀링겐 전투
비트슈토크 전투
켐니츠 전투
유터보크 전투
트리블 전투
추스마르샤우젠 전투
제1차 카스트로 전쟁
제2차 북방 전쟁
오스트리아-튀르크 전쟁
성 고타르트 전투
네덜란드 전쟁
라인란트 전역
잘츠바흐 전투
알텐하임 전투
훈장금양모피 훈장
기타 정보

2. 생애

라이몬도 몬테쿠콜리는 이탈리아 귀족이자 신성 로마 제국의 군인으로, 30년 전쟁, 제4차 오스트리아-튀르크 전쟁, 프랑스-네덜란드 전쟁 등 17세기 유럽의 주요 전쟁에서 활약했다.

1664년 센트고트하르트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 군대를 상대로 승리하여 황금양모 기사단 훈장을 받고 신성 로마 제국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었다. 1673년에는 튀렌 자작 앙리 드 라 투르 도베르뉴가 이끄는 프랑스 군을 라인강 서쪽으로 격퇴하고 을 탈환했다.

만년에는 군에서 은퇴하여 군사 행정, 문학, 과학 연구에 몰두하다 1680년 사망했다. 그의 아들 레오폴트 필립도 오스트리아 군의 장군으로 복무했다.

이탈리아 해군의 라이몬도 몬테쿠콜리급 경순양함 및 동명의 네임쉽은 그를 기려 명명되었으며, 후대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군 사령관 Rudolf Montecuccoli|루돌프 몬테쿠콜리영어가 있다.

2. 1. 초기 생애 및 군 경력

라이몬도 몬테쿠콜리는 1609년 이탈리아 북부 모데나 근교 파불로넬프리냐노의 몬테쿠콜로 성에서 태어났다. 16세에 신성 로마 제국 군대에 입대하여 30년 전쟁에 참전, 에르네스토 몬테쿠콜리 백작 휘하의 보병 연대에서 복무했다.

1631년 브라이텐펠트 전투에서 스웨덴 군대의 포로가 되었으나 큰 부상을 입고 석방되었다. 소령으로 승진한 후 1632년 뤼첸 전투, 1634년 뇌르틀링겐 전투에 참전했고, 1635년 대령으로 승진했다.

포메라니아, 보헤미아, 작센 등지에서 전투에 참여했으나 1639년 다시 포로로 잡혔다. 1642년 석방된 후 소장으로 승진했다. 1644년 군사 평의회 위원을 역임했고, 1645년 헝가리에서 트란실바니아 군대를, 도나우강네카어강에서 프랑스 군대를, 실레시아보헤미아에서 스웨덴 군대를 상대로 전투를 벌였다. 1647년 대장으로 승진했다.

2. 2. 지휘관으로서의 활약

1631년 브라이텐펠트 전투에서 스웨덴 군대의 포로로 잡혔지만 큰 부상을 입고 석방되었다. 소령으로 승진한 뒤에는 1632년 뤼첸 전투, 1634년 뇌르틀링겐 전투에 참전했고 1635년 대령으로 승진했다.

포메라니아, 보헤미아, 작센에서 일어난 전투에 참전했지만 1639년 포로로 잡혔다. 1642년 석방된 뒤 소장으로 승진했다. 1644년 군사 평의회 위원을 역임했고 1645년 헝가리에서 트란실바니아 군대를, 도나우강네카어강에서 프랑스 군대를, 실레시아보헤미아에서 스웨덴 군대를 상대로 전투를 벌였다. 1647년 대장으로 승진했다.

1661년부터 1664년까지 제4차 오스트리아-튀르크 전쟁에서 신성 로마 제국 군대 사령관으로 임관되었다. 1664년 장크트고트하르트(센트고트하르드) 전투에서 신성 로마 제국 군대가 오스만 제국 군대를 상대로 승리한 공로를 인정받아 신성 로마 제국 군대 총사령관, 군사 평의회 의장으로 임명되었고 황금양모 기사단 일원이 되었다.

1673년 튀렌 자작 앙리 드 라 투르 도베르뉴가 이끄는 프랑스 군대를 네카어강과 라인강 반대편으로 격퇴시켰다. 라인강 하류에서 오라녜의 빌럼 3세(잉글랜드윌리엄 3세)가 이끄는 군대와 합류한 뒤 을 탈환했다.

1674년 대선제후가 최고 사령관으로 임명되자 군대에서 은퇴했지만, 1674년1675년 겨울 튀렌의 성공으로 다시 복귀했다. 두 사령관은 몇 달 동안 라인 계곡에서 기동전을 벌였지만, 잘츠바흐 전투 전날 밤 튀렌이 사망했고 몬테쿠콜리는 즉시 알자스를 침공하여 콩데 공 루이 2세 드 부르봉과 기동전을 벌였다.[1] 1675년 말, 건강 문제로 현역 지휘에서 은퇴했고 로렌 공작 카를 5세가 그의 뒤를 이었다.[2]

2. 3. 은퇴와 죽음

몬테쿠콜리는 남은 생애를 에서 군사 행정, 문학, 과학 활동에 헌신했다.[1] 1678년, 카를로스 2세로부터 스페인 공작 칭호를 받았으나, 아말피 또는 멜피 공작은 되지 못했다. 신성 로마 제국의 공작 칭호는 사망할 때까지 얻지 못했으며, 그의 아들 레오폴트 필립 몬테쿠콜리가 1689년에 처음으로 공작이 되었다.[2][3]

몬테쿠콜리는 1680년 10월 린츠에서 사고로 사망했다.[1]

3. 군사 사상 및 평가

일반적으로 몬테쿠콜리는 튀렌, 콩데와 함께 당대 유럽 최고의 군인 중 한 명으로 평가받았다. 그는 오스만 제국의 진격을 막아내어 유럽의 구원자로 칭송받았다.[1] 그는 군사 이론가로서도 영향력이 컸으며, "전쟁에는 세 가지가 필요하다. 1. 돈. 2. 돈. 3. 돈."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1] 그의 저서 ''전쟁의 회고록''(Memorie della guerra)은 이후 전쟁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1]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그를 "17세기 전쟁의 거장으로서 비할 데 없는 인물"이라 칭하며, "요새화와 포위 공격, 행군과 반(反)행군, 적의 통신선 차단에 뛰어났고, 상비군을 옹호하며 군사 분야의 미래 추세를 분명히 예견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크로아티아 역사학계에서는 오스트리아-터키 전쟁 (1663–1664)에서의 역할 때문에 몬테쿠콜리를 주로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크로아티아의 페르도 시시치는 "몬테쿠콜리는 용감하고 신중하며 교육받은 사람이었지만, 동시에 너무 꼼꼼하고 느려서 크로아티아인과 헝가리인과의 갈등을 초래했다"고 묘사했다.[2] 특히 니콜라 즈린스키 및 즈린스키 가문과의 경쟁으로 유명했다. 시시치에 따르면, 몬테쿠콜리는 1664년 노비 즈린 함락의 주요 책임자로 여겨진다. 그는 적을 지연시키기 위해 수비대를 강화했지만, 합스부르크 군대를 이끌고 요새를 구원하거나 대규모 오스만 제국 포위군을 공격하지는 않았다.[2]

4. 가족 및 기타

몬테쿠콜리는 1657년 백작부인 마가레테 폰 디트리히슈타인과 결혼했다. 1698년 외아들 레오폴트 필리프가 사망하면서 가문은 단절되었지만, 백작 작위는 그의 딸들을 통해 오스트리아와 모데나 두 분가로 이어졌다.

참조

[1] 서적 A Warriors Life 2013
[2] 서적 Posljednji Zrinski i Frankopani na braniku domovine http://archive.org/d[...] Matica hrvatska
[3] 서적 Wiener Plätze und Nebenschauplätze: eine Stadtgeschichte vom Kohlmarkt bis zum Einsiedlerplatz https://books.google[...] Metroverlag 2008-01-01
[4] 서적 Mussolini′s Navy: A Reference Guide to the Regia Marina 1930—1945 https://books.google[...] Seaforth 2012-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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